밑줄과 새벽빛 사이
아버지의 밑줄
예순 번째 생일을 지나고 얼마 뒤, 책장 맨 아래 칸에서 아버지가 읽으시던 성경을 꺼냈다. 표지는 갈라졌고 책등의 금박은 다 벗겨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음성을 다시 듣고자 잠언을 펼쳤다.
3장 5절 아래에 볼펜으로 그은 줄이 두 겹이었다. 한 줄은 곧았고 한 줄은 조금 떨렸다. 곧은 줄은 젊은 아버지의 손이었을 것이고, 떨리는 줄은 나이 든 아버지의 손이었을 것이다. 같은 구절 앞에 아버지는 두 번 멈추셨던 셈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이 말씀을 들으면 약속처럼 들렸다. 마음을 다해 믿으면 길이 열린다고. 그런데 예순이 되어 아버지의 밑줄 위에서 다시 읽으니 같은 문장이 다르게 들렸다. 이 말은 길이 언제나 곧게 펴진다는 보증이라기보다, 내 명철로는 끝내 다 볼 수 없는 길이 있다는 고백에 가까웠다. 어쩌면 떨리는 두 번째 줄이 그 고백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그 떨리는 줄을 그으셨을 무렵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이 책은 그 밑줄과 나 사이에 흐른 시간에서 시작되었다.
듣던 자리에서 건네는 자리로
잠언은 “내 아들아”라는 부름으로 가득한 책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혜를 건넨다. 아버지의 성경으로 읽으니 그 부름이 활자가 아니라 목소리로 들렸다. 아버지가 짧게 건네시던 말들이 그 문장들 사이에 겹쳐 있었다. 오래도록 나는 아들의 자리에 있었다. 듣고, 지키지 못하고, 다시 듣는 자리였다.
예순이 되어 보니 자리가 바뀌어 있다. 이제 나는 건네는 쪽에 서 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서니 건넬 말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 아버지의 목소리로 읽어 보면 잠언의 문장들은 의외로 조심스럽다. 단정하는 말 같아도 그 밑에는 오래 지켜본 사람의 망설임이 배어 있다. 아버지의 말수가 왜 그리 적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세 자리에서 잠언을 읽는다. 지나온 예순 해를 돌아보는 자리, 너무 익숙해서 더는 보이지 않던 말씀을 다시 보는 자리, 그리고 남은 날들을 위한 지혜를 조심스럽게 건네는 자리다.
남은 예순 해라는 말
요즘은 백이십 세 시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 말을 그대로 믿자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내일을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예순이 더는 인생의 저녁이 아니라 오후 어디쯤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은퇴 뒤의 시간이 덤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삶일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졌다.
그 긴 오후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성경의 한 시인은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그는 날을 더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남은 날을 셀 줄 아는 마음을 구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남은 예순 해’도 숫자가 아니라 그런 마음의 이름이다.
다시 누르는 셔터
부제를 ‘인생 후반에 다시 누르는 셔터’라고 붙였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는 먼저 멈춰야 한다. 빛이 어디서 오는지 보아야 하고, 무엇을 화면에 넣을지보다 무엇을 뺄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이 책이 잠언을 읽는 방식도 그렇다.
먼저 본문을 천천히 본다. 잠언은 아무렇게나 모아 놓은 금언집이 아니다. 아버지의 긴 훈계와 솔로몬의 짧은 격언들, 지혜자들의 말, 아굴과 르무엘의 노래가 차례로 놓인 책이다. 한 구절은 앞뒤의 구절과 짝을 이루며 뜻을 만든다. 그 결을 따라 읽는다.
다음으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본다. 너무 많이 들어서 닳아 버린 문장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본다. 같은 나무도 해 질 녘에 보면 다른 나무가 된다.
그리고 정직하게 적는다. 잠언은 부지런한 자가 부하게 되고 의인의 길이 형통하다고 말하지만, 예순 해를 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장면들도 안다. 성실했지만 무너진 사람이 있었고, 바르게 살았지만 일찍 떠난 사람이 있었다. 잠언의 격언은 세상이 대개 그렇게 돌아간다는 지혜이지,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계약서가 아니다. 그 어긋남을 감추지 않고, 노출을 낮춘 사진처럼 어두운 대로 적으려 한다.
그 어둠 속에서 잠언을 한 사람의 얼굴에 겹쳐 본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라고 부른다. 잠언이 멀리서 그리던 지혜가 한 사람의 삶으로 와서, 의로웠으나 버림받고 선했으나 고난받는 길을 끝까지 걸었다. 잠언의 어긋남은 거기서 비로소 다른 빛을 얻는다. 이 책의 해석은 언제나 그 자리에 이르러서야 끝난다.
가끔은 동양의 옛 글도 곁에 놓는다.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 『장자』, 다산 정약용의 글이다. 『도덕경』 48장은 배움은 날마다 더하는 것이고 도는 날마다 덜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문장들은 잠언을 대신하지 않는다. 익숙한 잠언을 낯선 빛에 한 번 더 비추는 거울이 되어 줄 뿐이다.
한 해에 한 장씩
이 책은 잠언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예순 편의 글로 나누었다. 아버지의 훈계, 솔로몬의 잠언 두 묶음, 지혜자의 말씀, 아굴과 르무엘의 노래까지 다섯 부로 묶었다. 예순 편은 남은 예순 해를 한 해씩 비추는 작은 창이 되었으면 한다.
한 편에는 한 구절, 한 장면만 담았다. 많이 담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글마다 그림 한 장을 곁들였다. 해 질 녘의 실루엣, 어둠 속의 흰 꽃, 오래 열어 둔 셔터 속의 바다처럼, 글이 머무는 자리를 먼저 보여 주는 그림이다.
나는 이 책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걷는 사람으로 썼다. 답을 주기보다 내가 다시 본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예순 즈음에 서 있는 사람, 그 나이의 부모를 이해하고 싶은 자녀, 머지않아 그 자리에 설 사람들에게 이 글들이 아버지의 성경에 남은 밑줄처럼 한 번쯤 다시 펼쳐 볼 자리가 되면 좋겠다.
돋는 햇볕처럼
잠언 4장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젊어서는 이 구절이 성공의 그래프처럼 보였다. 지금은 새벽빛처럼 읽힌다. 단번에 환해지지 않고, 아주 조금씩,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밝아지는 빛이다.
예순의 아침도 그렇지 않을까. 이미 충분히 밝은 줄 알았는데, 아직 볼 것이 남아 있다. 그 빛을 따라, 아버지가 펼치시던 잠언의 첫 줄 앞에 다시 선다. 이번에는 듣는 아들로만이 아니라 건네는 아버지로 선다. 이 글들이 읽는 이의 남은 날들을 조금 더 선하게 하는 빛 한 줄기가 될 수 있을지, 그것이 이 책이 끝까지 묻고 싶은 질문이다.


